'일상기행기'라는 이름에 대하여

On the origin of the title "Everyday Travelogue" — a life motto born in 2003, and what came before it.

'일상기행기'라는 말은 오래전의 모토로부터 이어졌어요. E.L — Enjoy Life.

2003년, 나는 미술대학 꼭대기 층에 있는 만화·애니메이션 학부에 입학했습니다. 그전까지 예술이나 표현과는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어요. 그리고 사람들 앞에 '나'를 내보이는 일을 두려워하던 사람이었죠. 국민학생 때, 늘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아오던 아이가 방학 숙제였던 그림을 그려오지 않은 날, 교감 선생님은 전교생 앞에서 나를 지적하며 비꼬았어요. 나는 몹시 당황했고, 수치스러웠답니다. 그 일은 오래도록 나를 가둔 것 같아요.

그런 내가 그곳에서 처음으로 '작품'이라는 것을 만들어 사람들 앞에 선보였어요. 그 기분은 나쁘지 않았어요. 뭔지 모를 쾌감이 있었어요. 그 무렵부터 E.L은 내 인생의 캠페인이 되었어요. 기록에 집착하던 내 사진첩의 이름이기도 했고요.

그런데 시작은 훨씬 전이었을지도 몰라요.

아주 어릴 적, 영화광이신 아빠가 빌려오신 영화의 한 장면이 잊혀지지 않아요.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데, 칭기스칸에 관한 영화였던 것 같아요. 혀를 잘린 남자가 개처럼 칭기스칸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고 있었어요. 그 장면은 내 인생을 운전하는 뇌의 조타수 부분에 새겨졌어요. 그리고 그 때 알게 된 칭기스칸과 커가며 들어온 칭기스칸의 괴리감은 틈만나면 이 세상의 아이러니를 파헤치게 한 것 같아요. 그리고 답은 단순한 문장으로 남았죠. 인생 별거 없다. 즐기자.

영화와 소설에 탐닉했어요. 내 인생의 영웅들은 작가들이었어요. 글은 마법의 주문이었고, 글을 읽는대로 내 속에서 현실이 되었죠. 그림이 치유와 소통의 도구이자 놀이였다면, 글은 죽기 직전에야 닿을 수 있을거라 믿고 살았어요. 그래서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언젠가의 소재가 되리라 믿었죠. 맞아요. 그것이 E.L의 시작이예요.

하지만 실제의 삶은 훨씬 치밀했어요. 세월호 사건이 있었어요. 그 일은 내 삶을 통째로 흔들어 놓았고, 얼마 지나지 않아 양극성장애가 발현되었어요. 그 후로 인생 계획에 없을 것 같던 결혼과 임신과 출산이 있었고, 상처투성이가 되어 가며, 아니 환골탈태 해가며 가정을 만들어 가는 과정도 겪었어요. 병원에서 퇴원 후 고속버스 안에서 틱 증상을 억누르려 애쓸때마다 녹아버린 플라스틱처럼 거북스럽기 그지없었죠. 오랜시간 홀로 견뎌온 내가 남과 함께 가족이 되어 나를 갈아가며 맞추어갈 때엔 붉게 달아오른 무언가로 짓누르는 듯 고통스러웠어요. 하지만 그 불편함들이 나를 성장케 했던 것 같아요.

지나고 나니, 모든 것이 영화의 한 장면이 되었고, 경이로운 자가 치유 능력으로 아름다운 장면들만 남았어요.

그래서 나는 이제야 고통을 그릴 수 있게 되었어요. 오래 그것을 피해 왔어요. 총과 피와 참혹한 장면을 그리는 일을 거절해 온 것도, 환상 속의 이야기를 그림 속에 봉인해 둔 것도 같은 이유였을 것입니다. 이제는 삶을 아름다움으로 만들어내는 방법을 조금 알게 된 것 같아요. 늘 고통스러울 때 나를 치유하며 쓰던 유채꽃 노란 봄을, 다른 이들을 위한 애도의 색으로 그릴 수 있게 되었어요.

인생 별거 없어서 그냥 사라져버려도 상관 없다는 생각을 이 일상이라는 소소한 반짝이는 것들이 항상 나를 붙잡더라. 이제는 알아요. 늘 혼자 버티던 일상이 있었기에 지금 가족과 함께 하는 일상을 즐길 수 있다는 걸. 비록 나만을 위한 시간이 쥐꼬리만큼만 있다 하더라도요.

이제는 내 삶의 나침반이 된 아이들에게, 지독하게 싸웠던 남편에게, 그리고 이제는 좀 즐기며 사셨으면 하는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— 그런 일상기행기로.